자 서 전
본은 원고임
원고내용이 상당부분 수정되었음
이를 이해하고 용인하였음
(학생들의 사고를
작가적 입장을)
책의 성공적 발간을 위하여!!!!!
2018. 5.
이 득 인
다음 모두는 내가 쓰고 구술한 제출한 내용임
(이를 학생이 타이핑 하고, 작가가 수정(교정)하여 발간되었음)
나의 유언장
성 명 : 이 득 인 생년월일 : 1945.11.14.(음10.10.) 주민등록 : 1947.01.15.
주 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로 118-4(가산동) 작 성 일 : 2018.01.10.
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1) 배우자에게 – 관계없음,
2) 자녀들에게 – 잊고 잘 살기만 을!
3) 친구, 친지들에게 – 모두 오늘 같은 마음으로 평안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램(바람) 한다,
Ⅱ. 내가 떠난 후에
1) 나의 장례식 - 화장을 가족에게 선포하였다,
장례식 장소, 집례 – ‘나,’ 예다함 상조가입 하였으므로 부탁하고,
조문객 – 자식과 가족은 거 누구도 와서는 아니 된다, 그 왜 관계치 않는다,
※,나 죽음에 의미 없다, 지구상에 연기나 그림자로도 남고 싶지 않다.
2) 사후 유산 처리 문제
물질은 가진 것 없으므로 나누지 못함은 미안하고,
마음을 말하면 다 잘하고 있으므로 더 할 것이 없다,
바람은 모두, 만사는 건강으로부터 이므로 무조건 건강하길 바랄 뿐임,
※,자식은 아비가 준만큼은 사회에 반납하라!
Ⅲ. 그 밖에 남기고 싶은 말
논할 가치 없음 - 서로가 고통일 것이므로 혼자 조용히 가고 싶다,
※ 지식인이 먼저 깨우치고 스스로 반성하는 사회가 되길 바램(람)한다.
법관이 법을 지키는 나라가 되기를 갈망한다.
죄 지은 자가 반성 할 줄 아는 나라가 되기를 갈망한다.
현재로부터 나머지 생활계획(숙재)
1, 건강하자,
- 운동의 필요성,+ 생각과 사고의 폭을 넓히자,+ 특히 안구운동을 하자,
2, 스스로 개발 노력하자,
3, 남에게 피해되지 않게 하자,
4, 마음으로부터 봉사 하자,
5, 여행을 하자,+ 산행
6, 멋지고 힘차고 은근히 신나게 살자, (가난하여도)
7, 이웃과 친구들, 지금보다 더 잘 지내자, 그들이 나를 ★★★★★으로까지,
※지금도 잘 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8, 현재 하고 있는 소송을 더 열심히 하자, 꼭 승소함으로 법이 지켜짐으로!
※지금도 잘 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사법권이 스스로의 죄를 인정할 수 있는 진짜의 양심을 찾을 때까지 쉼 없이 끝까지 달린다.
혹 위 8,의 내용이 궁금할 수 있으므로 안내드림
인터넷 검색 : 건곤감리3456이득인, or ldi3456이득인,
2018.1.10.
이 득 인
나의 인생 표 작성하기(요약)
나, 이득인 - 부모님은 일본서 거주하시다 해방되어 귀국하시었고 1945년 11월14일(음10.10) 경상북도 상주군 백원면의 어느 한적한곳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슬하에 태어났으며 조부모님은 함창면 덕통리에 작은 아버지 댁과 따로이 거주하셨고, 조부님 아래 고모님, 아버지, 작은아버지 내(4명)분이 있으셨고. 나, 현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로 118-4에 거주함
‘나’(이득인) 가계도
조부님: 이장수 아버지: 이순록(종철) 형: 이득용, 나 이득인, 누이: 이순분, 제: 이우용, 제: 이우봉, 제: 이득우, 조모님: 김영애 (어머니: 박갑수)
나: 이득인 아들: 이재숭(출가) 처: 윤기정 딸: 이선민(출가) (나이는 만 나이가 아닌 우리나이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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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
년도 |
일 지 |
가 족 |
환 경 |
유 년 기 |
1945 (1살) |
경상북도 상주군 백원면 어느 한적한곳에서 나 태어남 |
부모,형 |
해방 후 열악하였으리라 생각됨 |
1948 (4살) |
경상북도 상주군 함창면 덕통리 157번지 이순분(복순) 태어남 |
부모,형,나,동생 4명,
부모,형,나,동생 4명, |
가난하였다 하여도 평화로웠다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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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6살) |
상기장소거주하며 6월25일 전쟁발발 토굴 생활함 ※북한인민군이 집의 소와송아지까지 잡아먹고 가면서 멍석과 짚신 등 모두를 가져같음, |
아마도 부모님이매우 어려운 시기였을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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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년 기 |
1951 (7살) |
경북 문경군 호서남면 점촌시장 창고건물거주 이우용태어남 나, 호서남초등학교 입학하였음. |
초등학교 입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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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11살) |
상기장소거주 동생 이우봉 태어남, ※동생이 태어나고 아버지께서 따뜻하라고 불을 많이 지펴 애기 궁둥이가 데워져 산양살고계시는 외할머니 모시려 형과 같이 버스타고 초행길 가는 중 잘 찾아 가고 있는 나를 형은 모르면서 ‘가겠다,’ 하였다고 윽박지르고 발길질하고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형은 그런 사람이었다.(별도태마구성) 이후 사회생활 또한 나에게 폐해가 많았다. |
신기리 로 이사함 ※운크라 원조로 대한양회 시멘트공장건설,
1956.8.호서남면-점촌 읍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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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문경군 점촌 읍 신기 리 로 이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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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년 기
청 년 기 |
1957 (13살) |
동생 이득우 태어남, 소주, 막걸리, 등 주점 업을 하므로 가사도우미하였다. 초등학교 졸업, 문경중학교 입학, |
갓 난 동생돌보기 장보기 음식재료 등 손질하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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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16살) |
점촌소재 문경중학교 졸업 가사전문 도우미 함(술 배달 재료준비시장보기 동생돌보기) |
형 동생 누구도 가사에 도움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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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16살) |
가사형편이 좋지 않아 형 이득용이 전년도 졸업하고 고등학교 낙방하여 동시 학업을 할 수 없어 학업을 포기 전적 가사도움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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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19살) |
어머니 39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심(사망) 어머님의 마지막을 나의 폼에서 마치셨다. 이때 참으로 막막하고 어이 할 줄을 몰랐다, 가시는 어머님의 마지막 맥이 강하게 한번 팅 기고 파르르 한참을 뜰 드니 가시었다. 이때 무어라 웅얼거림으로 말씀 하셨는데 알아듣지 못 하였다. 이에 주점 업을 할 수 없어 본격적으로 생활전선에 돌입 건설에 종사(붙임: 이력 경력서 첨부)객지(현장)생활 시작함 |
나의 슬픔과 분노! 아버지의 슬픔! 형의 불 칙 한 외박,,, 할 이야기(원망) 많음,
※건설종사 고난과 시련을 별도 태마로 기술하겠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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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년
기 ~ 장
년
기 |
1963
~
2001 |
전국 각지 현장 건설종사.(별 첨 합 철)
1968.입대 –1971, 만기제대 (공병 및 505(**공작대)근무)
가정꾸리기(결혼) 1974년 4월 5일 충남 서천출생 신부 윤기정과 혼인 ※가훈 정함 : 나의 할 일을 다 하는 사람이 되자! 거짓말 하지말자!
1975, 2.19.(음1.9.) 아들 이재숭 태어남 ※ 카이스트 졸, 서울대물리학박사학위 받음(2006.2.14.)
1976. 6. 5.(음5.8) 딸 이선민 태어남 ※ 동국대국어교육과 졸, 고등교직에 있음.
1988년 : 월세-전세-15차례 이사 후 광명시하안동 아파트 구입 입주하였음. (결혼후 14년 걸렸음) |
나, 부인, 아들, 딸, |
중학교 출신으로 멸시와 괄시를 받으며, 격동하는 격변기에 열심히 살았고, 오직 나만의 힘으로 작으나 집 장만하였고 재숭이 카이스트 입학 기념으로 아파트 사 주었고 서울대 앞 원룸 얻어 주었다, 이선민 졸업후 수원동우고등학교 교직으로 수원에 원룸 얻어주었다, |
노년기 |
2001 (57살) ~ 2006 (61살)
현재 |
2000년 곤지암 현장에서 다쳐 치료받으며 개인사업 할 때 2005년 예기치 않은 송사가 생겨 현제까지 법관과 법률적 다툼을 하고 있음. ※범죄자 판사·검사·대법관 등 528명을 검찰청에 고소하였고, 청와대에 고소, 고발, 탄원, 하였다. 송사관계는 별도 첨 부 기록함.(미제출)
현제 독거 인으로 100만원보증16만원 월세 살고 있음 |
송사로 이혼 독거 |
나를, 가해자는 허위사실로 공격하고, 검사·판사는 허위사실로 피해자를 징역살이 시켰으므로, 미래의 세대는 바른 법아래 평화로운 삶 살기를 바람으로 끝까지 투쟁한다. |
성명 : (李得仁) 본관 : 경주(副正公派)38世孫 2017.11.11.
- 수험생 여러분 시험 잘 보기를! -
2017.11.11.
2017.11.18.
2018.06.11.
2018.06.18. 작성자 : 구술인 이 득 인
기술경력 소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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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
#0077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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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
이 득 인 |
전 화 번 호 |
02) 893-3121 |
사 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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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기술분야 |
건 축 시 공 |
주민등록번호 |
47011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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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종 학 력 |
중 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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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이력서에 기재한 내용은 사실과 다름 없음을 서약합니다. 199 년 월 일 서약자: 이 득 인 (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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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력: 상기명 본인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사가 여의치 못하여 학업을 포기하고 가사를(가사 및 솔배달 등) 도 왔고 1963년 3월 25일부터 공사현장에 투신하게 되었습니다. 다음:년.월. 1963 . 3. 25. 광성건설(주) .대한양회 서빙고공장신축현장. +모래성토 물다짐정지위 분쇄실 및 포 장실건설 . ※래벨및트랜싵측량익힘,도면보기익힘(기사보) 1963 . 11. 1. 〃 .한일세멘트 단양공장신축현장. +사이로포장실,점토분쇄실,프랱홈,크랏샤 ~밀 사이 콤비아밸트공사. ※측량 및 현장감독 (기사보) 1964 . 5. 11. 〃 .유니온백세멘트 소사공장신축. +공장전공정,철근콘크리트라멘조및 철골조공사 ※현장감독및측량기사 (기사) 1965. 1.18. 〃 .배재중,고 우남도서관신축현장. ※ 〃 (기사) 1965 . 10. 1. 삼안산업(주) .호남비료 사원사택신축현장. +벽돌조 와가단독주택 단지건설시공 ※현장감독및시공기사 (기사) 1966 . 2. 21. 유니온세로판공업(주)건설위원회. +벽돌라멘조보온공사.질석공간쌓기및옥 덕소공장신축현장. 상질석 위방수,복층유리공법. W,T스라브 (P.C공법). .h45m고가수조(≒500톤)및 아파트5층1동단층5개동70세대시공. ※현장기사및시공감독 (기사)
1968 . 2 .20. 삼안산업(주) .재일은행 영등포지점신축현장. ※목공사(거푸집,내장)시공 (개인사업) 1968 . 10. 15. 육군입대 국방부 .육군00지역시설공사. +2층막사,단층막사,탄약고시공. 1971 . 9. 25. 만기제대 ※공병공사계 및 505부대근무 1971 . 10. 1. 신성건설(주) .천우전자 화곡동공장증축현장. +부록크및철강재공사 ※파이프트러스지붕시공. (개인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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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기술분야는 표준분류표의 기술분야를 기재하고?기술경력?은 그동안 자신이 수행한
건설공사 업무내용을 총괄적으을 요약하여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요령으로 기록하시기 바랍니다.
※ ?기술이력?사항이 많을 경우에는 뒤쪽이나 별지 A4 용지에 계속 기록하여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기술이력
1972.3.2. 〃 .천우전자 구로공장신축현장. ※현장기사 (기사)
〃 광진전자 〃 . ※현장기사 (기사)
〃 용인자연농원 돈사신축현장. ※현장기사, 물량산출 및 견적 (기사)
〃 한일재면 구로공장신축현장. ※ 〃 〃 (기사)
〃 천우전자 구로기숙사신축현장. ※ 〃 〃 (기사)
〃 대방빌딩 신축현장. ※ 〃 〃 (기사)
1974.7.1.동아건설(주)K,B,S여의도센타신축현장※목공사(거푸집시공책임자) (개인사업)
1977 . 5. 10. (주)삼환기업 .경주보문단지관광센타신축현장. ※단청공사( 〃 ) (개인사업)
1978.5.1.신성건설(주).부천대흥기계공장증축현장. ※견적물량산출현장시공 (현장소장)
1980 . 12. 12. (주)한양주택 .사우디리야드 러쉬현장. +철,콘내력벽고층아파트공사
※턴널폼시공목공시공책임자 (반장)
1982 . 1. 12. 대림산업(주) .사우디리야드하우징 현장. +P,C생산공장시공반장
※유공스라브및벽체콘크P,C생산 (반장)
1984 . 2. 22. 롯대건설(주) .사우디알카라지 고가수조현장. +H80-120m구형(호로병형)고가수조
※폼시공사(타워건설)책임자 (반장)
1986 . 3. 1. 경진건설(주) .명일동 한광교회신축현장. ※현장시공책임자 (소장)
1989. 2.20.초록기업(주).수원 삼성전기공장증축현장. ※현장시공책임자 (소장)
91. 2. 25. 〃 .수원 삼성전관 〃 . ※현장시공책임자 (소장)
1991 . 2. 26. 서광산업(주) .하안동 골든힐빌딩신축현장. ※현장시공책임자 (소장)
92. 3. 20. 〃 .양재동 인성빌딩신축현장. +무보, 유공 스라브 시공
※현장시공책임자 (소장)
1993 . 4. 1. 평천종건(주) .수원 남문백화점 개축현장. ※현장시공책임자 (소장)
1994 . 5. 1. 대건종건(주) .경기광주 신성전기신축현장. ※현장시공책임자 (소장)
위까지 건설기술위원회 건설기술자 등록 신고 된 사실(기술위원회검증 인정서 첨부)
1995 . 5. 1. (주)경보건설 .오산 경기도소방학교신축현장. ※현장시공책임자 (소장)
1998 . 5. . 〃 ※사업기획 및 견적 본사 건축 상무
1997 . 5. 〃 속초시 해양경찰서 신축현장 ※관리 (관리)
1999 . 7. 6. ㈜제이씨종건 .경기광주 헤펠레코리아 현장 ※현장시공관리 (관리이사)
2000. 12. . - 〃 - (현장 근무 중 다침-3.6개월 다리 깊스 함)
2000. 9. 〃 성남분당 조이하우스 빌라 ※현장시공관리 개인사업(동업)
이후 포천 오봉사 사찰 복원참여,
속초 향운사 사찰 개축참여,
2005. 까지 태안 영화사 사찰 시공참여 등 개인사업 하였음,
- 상기 이상 없음 -
끝
‘나’의(는) 가훈(좌우명,motto)
나의 할 일을 다 하는 사람이 되자!
거짓말 하지말자!
언행일치!
○ 유아기
고향마을 함창 덕통리는 5~60여호 중 반이 경주이씨 부정공파집성촌이었음, ‘나’ 38세손임,
부모님 귀국 – 1930년대 중반 경상북도 상주군 함창면 덕통리 에 조부모님과 아버지 동생(작은 아버저)분들을 두고 아버지께서 일본으로 출국하시어 일본생활 중 1940년대 초반 어머니를 만나(결혼)기위해 잠시귀국 하셨다가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가셔서(아버지-석공예, 어머니-방직공장 근무) 일을 하셨고 그곳에서 다소만은 수입을 고향 조부모님께 상당액을 주기적으로 송금하셨고 이는 당시 함창들 옥답(논)을 수십 마지기(1마지가150평≒495m2)살수 있는 금액 이었다 하였고 당시에는 재산목록 1호이고 부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송금하셨으므로 어머니께서 1943년 음12월15일 형 득용을 낳았고, 1945.나 득인을 가지시고 8월 15일 대한민국이 독립이 되어 일본 생활을 정리 귀국하셔서 고향에 와보시니 그동안 송금한 돈은 없고 부탁한 땅을 사지 않았고 그 돈을 작은 아버지(아버지 바로 밑)가 노름으로 탕진 하였으므로 팔십 리(약32km) 떨어진 곳 백은면 백은리에 임시 거처를 마련 나 득인을 낳으셨고 귀국하시면서 정리하여 마련하신 자금으로 고향 함창 덕통리(조부모님과 작은아버지 가족이 계신 곳) 에 당시 마을 앞 중앙에 터를 마련 동네에서 울타리 안마당에 우물이 있는 가장큰집을 지으셨고,
1948년 4월 여동생 ‘복순’(순분)을 낳으셨으며, 작으나마 논을 빌려 농사지으셨다.
○ 유 소아기
※ - 이때부터 나의 사물을 보는 눈과 기억이 또렷하게 나고 마당의 우물에 두 번 빠진(A이유는 후담으로 형(兄)편에 필(必) 기술) 사실과 집지은 후 봉당에서 마당에 떨어져 오른쪽 팔꿈치가 골절된 기억, 외할머니가 와계셨고 쌀을 빠아 팔에 감싸주셨다, 집짓는 마른 흙벽돌(약5kg)을 옮기는 시늉 등 이 뚜렷함)
이때 집을 짓고 나서 아버지께서 첫째 작은 아버지와 몇 날을 계속 큰 싸움이 있었고,
- 이는 아버지가 일본서 송금한 돈을 탕진 한 것과 조 부모님 으로부터 물려받아야 할 재산(논 과 밭 등)을
작은아버지가 독점하여 등기까지 모두 작은 아버지에게로 등록하였으므로 이를 분개하시어 어린나의 눈으로 목격한 사실은 온 동네가 말렸고 두 분 형제가 농기구 을 들고 피를 흘렸음을 기억한다,
이에 가장 억울한 분은 바로 나의 어머님 이셨다, 솔직히 문맹이신 아버지에게 시집오셔서 곳 바로 일본 생활하셨고 유창한 언변과 손재주가 많으셨으므로 ‘어머니말씀이’ 직장에서 돈을 많이 버신 것으로 말씀하셨고, (B어머님의 언변과 손재주에 대한 이야기는 소년 편 신기리 거주 편에 상세히 기록) 이러하므로 어머님이 벌어 모은 것 또한 모두 믿고 송금 하셨던 것이므로 상당히 분 하셨을 것이다,
이러함에도 부모님은 누구에게도 원망이나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내가 물어보았을 때뿐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의 문맹은 조 부모님 탓과 집안의 탓이 크다, 왜냐 하면 조부모님이 경작하시는 논밭이 당시에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다하였고 이로 농사감독만하여도 된다, 라고 고생하며 공부할 필요 없다, 라고 집안이 막으셨으므로 문맹이 되신 것이다-아버지 어머니 삼촌말씀 –소년 시절 물어본 답변이었다)
형 1950년 봄 어느 날 집안 우물가에 놀든 나는 형의 실수였는지 모르나 두 번이나 떠 밀리어빠졌다, 또 봉당(높이약6~70cm)에서 놀다 밀어 넘어져 오른쪽 팔꿉이 이탈되었다, 이때 외할머니가 쌀까루로 깊스 해주었다.
이때 1950.6.25.북한의 남침전쟁이 일어났고 가을쯤인가 인민군이 우리 동네로 들어왔고 형과 나는 마을 앞 야산에 토굴을 파고 거기서 생활하였고,(이는 폭격을 피하려고 부모님이 배려하신 것 이었다,)
지금의 우리 편재로 보면 소대정도병력이 우리 동네에 왔고 우리 집에 장교가 있었다, 면소재지인 함창에 상당한 빨갱이들이 있었다 하였다, 이때 호주기(호주공군기(영국제) - 당시 영부인 프란체스카모국(오스트리아)기로 잘못알고 있었고, 소련제 미그기를 압도한 것은 F-86 미군기였다, 문헌참조)를 보았고 전투기가 뜨면 모두는 나무 밑이나 집안으로 보이지 않게 숨기 바빴다,
그 들 인민군은 잡낭(지금의 배낭 같은 것)속에는 쉬어빠진 딱딱한 송편과 썩어가는 과일 몇 개뿐이었고 또 그들은 우리가 키우던 암소와 송아지도 잡아먹고 우물 앞에서 도살하여 우물이 붉게 물들었었다,
근대 그들은 말아놓은 멍석과 짚신까지 몽땅 가지고 겨울이 오기 전 가버렸다, 동네가 모두 같이 당하였다,
그런대 동네 주민은 인민재판을 받거나 다치거나 죽임을 당한 사람이 없었다,- 부모님 말씀.
이는 우리 모두의 부모님들이 참으로 고통과 괴로움 이었을 것이다,
○ 소년기(나의 소년기는 그냥 맹목적 살아 있었을 뿐 소년 이득인은 없었다,)
1950년 부모님께서 새로 지은 집도 버리고 고향에서의 생활을 접고 경상북도 문경군 호서남면 점촌리로 이사하여 점촌리 시장(5일장) 창고 집에서 생활을 시작하였고 이때는 미군들이 오가며 초콜릿 등 C레이선 박스를 돌리고 하였다,
이때생활은 시장 장이서는 날 주점을 하고 창고에 미곡이나 장사물건을 보관하는 업을 하였다,
이듬해 1951년 1월 동생 ‘우용’이 태어 낳고,
‘나’ 호서남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학교)
이때 나는 성장발육이 늦어 전교생 제일 앞에 서게 되었다,
방공호(학교 옆 돈달 산 계곡에 피하는 것) 교육을 수시로 받았다,
‘나’ 공부는 소질 없었고 항상 꼴등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공부할 여건이 아니었다, 이는 어린동생 둘이 있고, 어머니를 도와 애기보기 심부름하기 청소하기 마늘다듬기 고추 절구 찧기 등 모두 나의 몫이었다,
이는 어린이가 애기 보기였다! 그런대 잘 해 내었다, 지금 생각해도 공부는 못하여도 참으로 기특하였다, 이는 늦되거나 대기만성 형일까, 군 신채검사 IQ129였고 부대 검사 IQ138이었다, 나쁘지 않음 경력이 증명,
(A ‘형’은? ‘형’편에 기술,)
1955년 11월 동생 ‘우봉’이 태어 낳다, 이때 동생이 태어나 아버지께서 산후조리를 도운다고 군불을 만이 지펴 동생의 궁둥이가 대였고, 하여 산양 외가 집에 할머니 모시러 형과 같이 갔다,
이때 이상한 것은 외가동네에 들어서 집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외할머니가 나를 알아보시고 반겨주셨다. 근대 이상한 것은 형이 같이 갔는데 형은 못 알아보시었다. 분명 형은 모습이 외탁 이었는데 지금도 궁금하다, ‘형’편에 논하기로....
동생이 또 태어남으로 나의 일이 더 늘어났구나, 라고 이는 당시 문득 문득 생각이 났었다,
〈2017.12.02.오름〉
점촌생활은 당시의 주변상항에비추어 모두가 전쟁과 후유증으로 고통이었고.
나 학교생활을 나대로 하였고 “ 나” 는 항상 지실배기였다, 형에게는?
“형”, 형은 태자였고, 귀족이며. 나, 는 머슴, 또는 심부름꾼, 또는 애 보개, 등 보조 품 이었다.
학교친구들과 장마당에 모여 놀아도 형은 나를 쫒아 보내 곤했다, 내 친구들이랑 놀면서, 집에 가서 애기보라고 주먹질도 하면서, 당시 나는 그냥 놀고 싶었을 뿐 어떠한 감정도 표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삶이 이후 계속 된다.
1955년 말 신기리 로 이사하게 되었다,
※한국이 산업 기반시설이 막 깨어 나 던 때였다,
첮제 : 대한양회 세멘트 공장 건설,
둘제 : 충주비료공장건설
세쩨 : 쌍용, 한일, 등 세멘트 공장 건설
등등의 시설건설로 식량증산이루고 세멘트 수출부터 산업 혁명이 이루어졌다.
이곳 신기에 유엔지원으로 운크라 원조 받아 산업공장인 대한양회 세멘트 공장을 건설하고 있으므로 부모님께서 주점 업을 하시게 되었고 이때 주종은 막걸리를 우차(소달구지)로 일주에 2회 운반 하였고,
(탁주-면사무소인 점촌에 양조장 있으므로 후일중학시절엔 내가 매일같이 자전거로 실어 와야 했다)
소주(안동 재비원 상호)를 닛산 트럭으로 한 달에 두 번 수송 받아 영업하였다,
“나”, 일상은 초등학교 5학년6학년 20리 산골길 걸어서 등하교하면 동생보기-귀저기(당시엔 면 귀저기 였음),살피고 갈아주고 업어 주고, 음식재료 손질하기(파, 마늘 생강 고추다듬기 절구에 찢어 가루 만들기, 오징어 손질 어물 손질) 등 모두 어머니 아님 나의 몫이었다,
1957년 초등학교졸업, 문경중학교 입학,
5월 6일 동생 득우, 가 태어났고,
초여름 동생 우용, 우봉, 데리고 나가 놀다 오라 하셔서 3km정도에 있는 영강(낙동강상류) 영시비리에 멱 감고 오니 동생을 낮에 보게 되었다, 반갑고 기뻤다,
또한 나의 일이 늘어났다, 또다시 귀저기갈기와 없고 달래며 집안일 도와야 하는 일 등,
“왜“ 냐 하면 앞에 기술한 가사 돕기도 바쁜 ‘나’,를 이해하여 주는 이는 이웃 아주머니 들 뿐이었다.
“형”은 집안에 장손이라고 모든 잘못이 용서되고 동생“복순”이는 귀한 딸 이라고 귀염 받고, 잘못된 모두는 ‘나’의 몫으로 남았다,
“형”은 ‘나’(가족)에게 평생 도움 되지 않은 장애일 일뿐이었다, ‘나’를 매개로한 동생들에게 도움이 있었을까?
“형”은 두 살터울인 ‘나’, 내가 국민(초등)학교를 1년 빨리 입학하였으므로 1학년 선배로 호서남국민(초등)학교, 문경중학교를 같이 다녔고, 이때 형은 정상으로 성장이 되어 중상위였었고 부족함이 없었으나 ‘나’는 성장이 부진하여 학교 600명중 제일 작은 끝에서 네다섯 번째였고, 이러한 내가 아침 등굣길에 자전거에 막걸리 통(나무통으로 2말,1말이 있음) 싫고 20리(7.8km)자갈길과 모래 길을 해쳐 읍 소재 양조장에 대기시키고 등교 하교 길에 막걸리 2말들이 한통 싫고 귀가하는 대 ‘형“은 세멘트 공장에서 제공한 출퇴근용 리무진 버스로 통학 하면서 몸보다 큰 짐 자전거에 몸보다 무거운 술통을 싫고 자갈 밭 모래밭18도 경사고개 등 어렵게 어렵게 끌고 주행한 ’나‘를 도착하기 바쁘게 공터 태니스 장에 끌고 가서는 통학 버스가 오면 옆으로 피하던 가 세우고 들에 피하여 있을 것이지 피하지 않고 가운데 길로 계속 갔다고 하면서 창피하고 부끄러웠다고, 마을 듣지 않는다고 발길질하고 주먹질하고
따귀를 때리고 하였다, 너무 억울하지 아니한가?-----
‘나’ 어리므로 자전거 자체만으로도 버거운데 비포장 시골길 술통을 싫고 차량이 다녀서 가운데 길은 평탄하고 단단하지만 도로 가변은 자갈과 모래가 밀려 있어 자전거가 지탱할 할 수 없고 비켜주다가 넘어지면 술통이 깨어지고 틀어져 술이 솟아지므로 어쩔 수 없다, 라고 하 엿 드니 대꾸한다고 더 두들겨 맞았다,
이제 말한다, ‘나’ 뒤에서 오는 버스를 어떻게 알며 미리 비키고, 앞에서 오는 반대편 차량은 어떻게 할 것이고 이를 잘 아시는 통근버스기사 아저씨는 ‘나’를 배려한다고 놀랄까봐 경음도 울리지 않고 조용히 좋은 길나올 때 까지 서행하여 주셨음을 고맙게 생각하였다, 이는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형” 이라면 차에서 내려 자신이 자전거를 받아 가야 하지 않는가? 어린 동생이 동생으로 보이기나 하였는가?
또한 “형”은 어쩌다 쉬게 되는 날 내 친구(나의 동기며 같은 반)들과 4KM거리에 있는 운암사 절로 절구경가면서 같이 가는 ‘나’를 집에 가서 애기보고 심부름 하라고 쫓아 보내므로 따라가니 돌팔매질하여 결국 ‘나’ 되돌 아 오고 말았다, ‘나’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이야기 할 곳이 없으니까? “형”편은 뒤에 다시.....
또한 여동생 “복순”이는
이로부터 동생 복순 이와 ‘나’ 1962년 어머니 돌아가시고 생활 시작 할 떼까지 많이 다투었다,
이때 위에서 말 한 것처럼 ‘나’ 술 배달하랴, 동생 돌보아야 하고. 주점 장사 준비해야하고,
복순 이는 귀여운 동생이지만 가사를 도와주었으면 하였으므로 복순 이도 10살로 아래 동생이 셋 이니까 어느 정도 할 수 있으므로, 그런대 집안의 귀여움만 있었으므로 교회다 친구다 놀기 바쁜 동생을 내가 가끔 불만 서러워하였고 이를 계속 작은오빠는 나만 괴롭혔다, 고 후일까지(아마 지금도)원망하였다.
원망 할 것이 아닌 도와야 하였다.
그럼 ‘나’는 무엇 이었나?
우리 모두 철없었던 시절, ‘나’는 그냥 떠밀려 고초를 감네 하였고, 주어진 환경에 의하여 묵묵히 일하여 왔다, 생계가 문재 이었으므로 이였다.
그러나 1962년 말12월3일 어머니 운명하시고, 아버지께서 중심을 잃으시고 강원도 삼판(벌목, 원목벌채)사업에 투자 하시고 사기를 맞아 일시에 가사경재가 무너졌다,
이때부터 가정생활(주부역할)을 전적으로 동생 복순(순분)이가 하게 되었다,
‘나’ 이때부터 대한양회 세멘트 공장 채석장에서 작은 채구로 어른들이 하는 일 니야카(손수레)로 돌 운반하는 일 등하였고,
도시락은 동생이 맷돌 돌려주고 얻어온 콩비지에 보리밥 썩어 있었고 이도 일하는 ‘나’에게만 복순이 보리밥을 썩어 준 것으로 안다, 집안 생계비가 ‘나’의 수입으로 하였고 동생 복순이도 이웃집 두부 맷돌 돌려주고 비지 얻어 와 끌려 먹곤 하여 도움이 되었고,
동생 복순이가 고생 많이 하였다, 그런대 우용 우봉 득우 등 동생들은 저절로 크고 누나가 고생한 것은 아마도 지금도 모르쇠 할 것이다,
득우는 2015년 현재 ‘내’가거주하는 가산삼익아파트로 이사 와서 10여년 만에 밥 한번 사면서 한말이
득우 왈
“나는 누구도 나를 돌봐주지 않았고 나 스스로 개척하였고 고생만 하였다, 라고 이를 갈며 토로 하였다,
형인 나에게 철들어 밥 사준 것이 아니고 원망 하려고 왔나보다, 라고 생각하며 보지 않기를 바람 하였다.
‘나’의 소년기는 없었다, 또 다음 기술 할 청년기도 없었다, 이를 누구도 원망 한적 없었다.
‘나’ 1960년 문경중학교 졸업하였고,
이때부터 본격적 아버지 어머니 하시는 집안 주점일 도왔고 배달하고 장사준비물시장보기, 장부정리하기(출납과 외상 장부) 등 일선에 서게 되었다,
여기서 지난번 언급한 어머니의 일상을 말하려 한다,
어머니는 170cm 가까운 키에 얼굴형은 김혜자씨, 이미숙씨, 등 모습이 비슷한 혼재한 모습이며,
(내가 보관하던 유일한 사진을 나‘ 군 입대하며 형수님께 드렸고 이후 볼 수 없었다,)
엄 하고도 인자 하셨고, 자식들 사랑이 무지 크셨다,
아버지의 우직하고 강직한 성품에 어머니가 고초가 말이 아닌 고난이셨다,
1950년 말 고향을 떠나오신 후 주점 업을 운영하시었고 앞에 기술한대로 음식 솜씨가 탁월하셨고, 유창한 언어 실력으로 운크라 기술지원단의 외국인들의 부인들이 일본인이 많아 그들이 가게에 장보러오면 장사를 못할 정도로 통역으로 불리어 가곤 하셨다,
모두 접어도 어머니의 인간관계는 탁월하셨고 점촌 생활이나 신기 생활애도 이웃 주민과 친숙하셨고 특히 이웃의 아주머니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 아주머니들께 귀염을 많이 받았다, 상당히 고맙습니다, 라고 지금 인사드립니다,
이와 같은 생활 속에 어머니께서 1957년 동생 득우 를 낳으시고 산후 조리가 잘못되어 계속 병 치례 하셨고 급기야 1962년 여름부터 많이 불편하시다가 읍네 병원 의사가 1주에 2~3회씩 방문치료 하시고 급기야 12월3일 아버지 계신 자리에서 나의 품에 안기우신 체 운명하시었다.
운명하시면서 웅얼웅얼 무어라 말씀 하셨고 귀기우려 들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심장 박동과 맥이 강 하게 서너 번 퉁기시고 이어 파르르 한참을 뜨시더니 가시었다,
이때 아마도 새벽 3~4시 정도였고,
이제 “형”,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 하려고 한다.
먼저 중등학창시절 앞에서 기술한바 대로 자신만 아는 무한 무치자로 1960년 경북 대구시의 한 고등학교 입시에 낙방하고 귀가하였으면 부모님을 도와 일선에서 동생들을 보살펴야 할 형으로서, 서너 번 술 배달도 하였지만, 친구들과 놀이에 바쁘고 어머니 아버지께 대들고 반항하며 닭서리 밀 서리 등 불량한 짓거리하고 다녔고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불같은 훈육에 말리시다 다치시기도 하는 등 애를 태우셨고, 어느 날은 형이 말을 듣지 않으므로 형이 씻고 있던 대야의 꾸중 물을 “죽자 죽으시겠다.” 라며 벌컥벌컥 마시기도 하셨다.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었고 1960년 4.19의거 혁명 때 대구에 사시는 막내 작은아버지가 대구시 자유당 도당 간부이셨으므로 자유당 상임 위원장 장경근 씨와 일본으로 출국 하셨으므로 작은어머니께서 신기 우리 집에 한 계절 머무실 적에 이웃 먼 일가어른이 가사 도우미로 일하고 있을 때 형의 불량한 행동을 나무란 것에 반감하여 아주머니를 달려와 이단 옆차기로 덩어리를 짓밟아 버렸다,
이에 아주머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눈치만 보고 있었고 대구 작은 어머니는 이후 대구로 귀가하셨고 다시는 오시지 않으셨다, 의거학생운동으로 시끌시끌하였으므로 무척 고달팠으리라 생각되었음 (작은어머니께서는 추석날 설날에만 다녀가셨음)
이후 작은아버지는 대구시민과 인근지역 지인들의 무고함의 탄원과 도움으로 곳 귀국하셨다.
불효 자,
‘나, 부모님께 왜 좀 더 잘하지 못하였을까? 라고 생각되었다, 지금의 이성적 판단이나 가족, 생활, 모 던 관계를 느껴서가 아닌 그냥 단순히 생각되었다.
나, 실재로 큰 잘못이 많았겠지만 특히 – 어느 장날 시장에 쌀사러 심부름 가서 쌀은 사지 않고 야바위(좌판에 딱지를 놓고 맞추기 하는 노름)를 하여 쌀 두 가마 값을 잃어버리고 빈손으로 돌아가 저녁에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났었다, 이렇게 혼이 난후, 하여서 아니 되는 일과 해도 되는 일에 대하여 생각을 좀 더 하게 되었고,
지금의 생각으로 이때 어머니의 애타는 마음을 보았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얼마나 큰 불효인지를 지금에야 알고 후회되기를 가슴 아프다.
이러한 상항 속에 1962년12월3일 어머니가 가신던 날 밤 전날에도 어머니 병간 하지 않고 형은 어디에도 없었고 나는 사택 병원(대한양회건설공사직영) 문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고 어떻게 할 줄을 몰랐으며 아버지께서 형을 찾아오라 하시어 동네를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평소에 우애 있게 같이 다녔으면 대충이라도 어디인지 알았을 탠대 )
하여 분노한 밤은 가고 어머니도 기시었고 아침 8시경에 형은 울고 있는 나를 보고 ‘인마 왜, 울고 있어,’ 라며 어머니 모신자리 둘러친 평풍을 보고도 왜 그래 라고 하는 “형‘ 이었다,
전날 위급한 상항인 것을 느꼈을 탠대도 어디에 있었는지? (여기서 사실과 생각을 줄임/본인이 思考하리라!) 어머니 임종도 못보고 하였으나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래도 “형”인 것이다.
형이 보는 동생들은 자신을 위해야하고, 자신이 존재하여야 하고, 모두,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야 하였다,
※ 후일 나 또한 아버지 가시는 길 임종을 보지 못하였고 가시는 영구도 같이 모시지 모하였고 하관도 보지 못하는 어떠한 이유도 가질 수 없는 큰 불효를 하였다, 그르나 가신 아버지의 외로웠을 생활을 생각하면 많이 아프지만 모시고 살지 못한 불효를 알지만 아버지와의 같이한 애정은 누구도 모르는 깊은 정으로 서로 이해하고 나누며 반기고 위로하며 살았음을 자부하며 생각한다, 아버지 – 아버지 내 아버지셨다. 가슴으로 외쳐본다.
후회,
어머니께, - 평안으로 영면 하시기를 -
어머니생전에 너무나도 많은 투정을 하였고, 거짓으로 아픈 척, 슬 적 숨어버리는 등 되지 않은 꽤 을 부리고, 왜 이리하였는지?
어머니 가신 후 생활이 급박하여 생각지 못하였고, 지금은 너무도 후회되고, 다 말씀을 따라 드릴 수 있었음을 후회한다,
단지 思考가 없던 어린 마음으로 ‘친구들과 비교되고, 비교되면 나의모습이 부끄러웠고, 돌아보면 애기(동생)업고 허드레 일 한 것은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 이었다, 당연히 해야 하고 가사를 도움이 ’왜, 부끄러웠는지? 지금은 그 시절 나의 생각이 더 부끄럽다, 이모두가 불효에서 오는 잘못이었다,
효도,
효도가 무엇이고 불효가 무엇인지 지금처럼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어머니 가신 후 단순하게 잘 해야겠다, 라고 생각되었고,
혼자되신 아버지의 말씀을 절대 거역하지 아니하였다,
단, 한 가지 주장을 세워 관철한 사실은 당시 잘못이었을지 모르나 “시골을 떠나야 할 형편임으로 형은 대구로 가자하였고,(작은아버지가 계시니까 도움 받을 수 있으므로) 나는 서울로 가자고 하였다,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한강변 대한양회 공장을 신축하는 현장생활을 삼 계절 하였으므로 서울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고, 대구 작은아버지와의관계가 무조건으로 형만 편애하므로 나는 좋지 않았으며(관계에는 뒤 가족사에 기술하기로) 반감이 많았다.
※ “형”의 사회생활 편을 뒤 청년기에 기록함
○ 청년기 참고 -이야기(story) 1, 2, 3, 가족이야기 / A ,B, C, 현장 사회이야기-
생활
1) 1962년 12월 29일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께서 영업을 접고 가지신재원과 집을 담보로 하여 강원도 정선에 삼판(벌목)사업에 손 데시고 이것이 잘 못되어 고초가 심하셨을 태고 따라서 식구들이 고난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난감하여하셨고 우리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가슴 아파 하셨던 것 같았다,
이에 나는 대한양회 문경공장 채석장에서 니야카(손수래)로 석회석 돌 운반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어른들은 50~60회 하는 일을 25~30회 정도하였으므로 수입이 적어서 가족이 생계비가 상당히 부족하였다,
2) 1963년 3월경에 아버지께서 귀가하셨으므로 의논 말씀드리기를 ‘나’, ‘서울에 가서 일하겠다. 말씀 드렸더니 고생 서러움을 걱정하시면서 격려 해 주시었다,
이에 1963.3.24.날에 채석장에서 모은 돈 280원을 들고 3월 하순경에 서울로 일 하러 가게 되었고, 이때 문경군 점촌 읍 신기리 에서 서울 을지로 6가까지 차(버스)비가 265원하였고 새벽6시 출발하여 울퉁불퉁한 시골길먼지 투승이 길을 종일 달여 을지로6가 도착을 저녁6시(18시)에 하였다,
다음 을지로6가에서 2원50전에 용산가는 전차타고 용산역에서 내려 서빙고동 쪽으로 사거리 지나 길옆에 중식당 들러 우동 한 그릇하였다, 값은1원80전이었고 종일 굶고 왔으므로 허기진 상태에서 맛나게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가방을 둘러메고 서빙고 현장까지 약2km의거리을 걸어야 하였고 가방은 왜 거리 무거운지,
어찌하였거나 무사히 현장 도착하였고 먼저 와서 일하고 있던 고향 형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내용물은 작업복과 책이 3분지2였다,) 그래도 잘 참고 이겨내어 무사히 현장에 도착하였다,
※책은 종로학원에 등록하여 공부를 하여 보고 싶었음으로, 그르나 일에 치이고 돈을 벌어야 하였으므로 곳 포기하였다, 가족의 생계가 있으므로 포기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공부의 부족함은 늘 갖고 있다, 지금도)
3) 현장생활은 새벽6시30분전에 기상하여 세면과 식사를 마치고 7시전에 현장사무실로 가 있어야 하였다,
내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이 없었다, 신체가 허약함이 아니고 단지 키가 작았을 뿐이었다,
하여 콘크리트 믹서기에 넣는 자갈운반 모래 운반하는 짐 통 지는 일로부터 자재 정리 및 나르기 등
닥치는 대로 열심히 하였고, 일과 마침은 오후7시이었고 뒷정리 하고나면 오후7시30분이었다,
어느 날은 주간에오기도 하지만 저녁 8~9시경에 자재가 들어 올 때는 과외로 하역비를 벌수 있었다,
이도 고향의 형들이 신장이 작아 부족한 나를 끼워주곤 하였다,
또한 한강모래를 덤프터럭에 싣는 작업(모래상차)에 일원으로 끼워주었고,
모두는 나를 도우려 애들을 많이 써셨다,
하여 차츰 현장일이 익숙하게 되었고, 3~4월 두 달이 지남에 광성건설 현장소장님과 기사분이 열심히 하는 나를 좋게 보았는지 먼저 측량하는 기술부터 알려 주었고 또 도면 보는 법도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이리하여 현장생활에 익숙하게 되었고 수입도 좋아졌다,
※ 이를 깊이 감사한 마음으로 고마움을 표합니다, 고향 형들, 그리고 소장님과 화사직원들, 모두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고향에 귀가하여보니 그동안 학교 교실 뒷자리 않던 친구들이 나보다 키가 작았다, 서울 삼 계절에 키 성장을 다하였다, 이때 신장 170.5cm이었다,
4) 이재 봄여름가을동안 열심히 일한 보람이 되어 공장을 준공하게 되었고 ,
회사에서 나를 충북 단양에 건설 중인 한일 세멘트공장 신축 현장에 보냄으로 잠시 귀가하였고, 아버지는 객지에서 복구하려 애쓰시고 다니심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형제가 고난 함을 말로 할 수가 없다,
하여 나가진 것으로 쌀 한가마 두고 단양일터로 갔다, 도착한 나 이잰 현장생활이 익숙하고 할일도 많았다,
1963.11.1.한일세멘트 단양공장신축현장.+사이로포장실,점토분쇄실,프랱홈,크랏샤~밀 사이 콤비아밸트 공사
※측량 및 현장감독 (기사보)
ㄱ 점토 분쇄 실 즉량 작업 기준틀 만들기, 작업감독
ㄴ 플렛폼 과 사일로측량 작업 기준틀 만들기, 작업감독
ㄷ 채석장 에서 분쇄실 까지 약2km 콤비아 설치 교량가설 측량 하는 일 등(※이때 한양대학교 토목과학생들이 우리 회사로 와서 측량하는 일(실습)을 같이하였다,)
ㄹ 분쇄 실 굴토작업 확인 만보주기, 작업감독
※ 싸이로, 포장실, 공사중 낙상사고로 인명이 한분 사망한일이 있었다,
이야기(story) 0
※ 강원도 정선에 계시는 아버지를 이때 잠시 찾아뵈었다,
벌목사업 실패(사기 당함)하시고 복구하려고 상주하시고 계셨는데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지만 움막에 거처하시면서 고초가 심하심을 보았다, 강건하신 모습이 차츰 사라지고 계셔서 마음이 아리고 아팠다, 이때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아버지로의 부자간, 혈육이란 것을 일깨우게 되었고. 인생에 진로랄까 약간의 사고가 생겼고, 진실로 부자의 정을 나누었다.
※형 이득용의 위급하다는 전보를 받았고 삼일의 휴가를 받아 귀향하여보니 위급함이 아니었고 입대하게 되었으며 생활고이었음을 알게 되어 당시 귀한 라도 손목시계를 맡기고 몇 푼의 돈과 생필품 사놓고 현장으로 복귀하였다,
이때 형제에게 아버지의 근황과 부모님의 배려를 느낌대로 말하여 주었다,
이곳 단양일이 끝맺음으로서 일부남고
5) 1964. 5. 11. 유니온백세멘트 소사공장신축. 공장 전 공정참여, 철근콘크리트 라멘 조 및 철골조공사 현장감독 및 기사(보조)로 신축현장 투입되었고,
1965. 1 .18. 배재중·고 우남도서관 신축현장. (기사)
1965.10.1. 삼안산업(주) .호남비료 사원사택신축현장. 벽돌 조, 와가 단독주택 36개동 단지조성 및 주택건설시공 현장감독 및 시공기사
※이때 나의 부족하고 미안한 마음을 술회하고 간다,
1965년 초 형 이득용을 재외하고(형은 대구 작은집으로 갔다) 우리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하였고,
신촌시장의 가게자리 하나를 빌려 거처를 하였고,
세가 일일 100원씩 하였다, (참고-당시한국 선반 최고기술자월급이 5000~6000원이었다,)
이를 견딜 수 없었으므로 연희동의 한 농가주택의 외양간에 숙소를 하였다, 이때의 주인어른이 베푼 배려가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였습니다, 지금기억이 없지만 월세를 거의 아니 받은 것으로 생각 합니다,
이때 ‘나,’ 새벽 5시에 일어나 홍제동을 거처 불광동 지나 갈현동 박석고개에 있는 호남비료 사원사택 공사현장까지 걸어서 출근 하고 다시 19시30분경에 퇴근하면 걸어서 2시간정도에 집에 도착하였고, 가끔은 버스를 타기도 하였지만 버스비가 아까웠다, 또한 이때 피곤으로 코피를 자주 흘렸다,
5월 늦은 봄 어느 날 동생 이우용 이의 배우고 싶어 하는 하소를 연희동 뒷산에 올라 나의 바지자락을 잡고 “형, 나 공부 할래 학교 보내주어요, 라고” 눈물 짖든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들어주지 못한 나의 아픔을 말한다,
동생의 참으로 간절한 소망이었고, 공부를 할 자격도 갖추고 있었다, 시골 학교 다닐 때 항상 상위였고 서울에 와서 피어선 공민학교 수업을 1개월 다니고 0점을 받아왔고 시험지를 보고 이를 갈더니 다음 2개월 후 영어 수학 모두 만점을 받아왔으므로 자격이 있었다, 한 대 나의 능력이 부족함을? 아버지께서 신촌로터리에서 니야카 끌고 계시므로(손수레에 짐 운반하는 일) 당장의 생계비에 우선하고 미래를 보지 못한 우둔함으로 동생의 길을 살피지 못한 ‘나,’?????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끝내 한이 되고 만 동생 이우용아 정말 미안하다.....또한 동생들 모두 미안하다.
1966.2.21. 유니온세로판 공업(주) 덕소공장신축현장. 건설위원회 종사. 벽돌, 라멘 조 보온공사. 질석 공간쌓기 및 옥상질석 위 방수포장, 복층유리공법(pair glass). W,T 슬라브(P.C공법). h45m고가수조(≒500톤,m3) 및 아파트5층1동 단층5개동70세대시공. ※현장기사 및 시공감독 근무,
이야기(story) 1
이때 7월경에 형 이득용이 찾아와 제대하였다하여 건설위원장님께 형의 취직을 청원하여 공사용수 및 공장에서 사용할 공업수를 올리는 가벼운 일의 폼프실 근무를 할당받아 일하게 되었고, 여기서 착실하지 아니한 근무시간에 외부로 나가 한두 번도 아닌 근무지를 이탈하여 펌프가 정지되는 사고를 발생시킴으로 근무정지를 당하였고, 하여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물어보니 피브이씨(pvc chemical)파이프 용접작업을 해 보겠다하여 다시 천거하여 이태리 pvc chemical전문기술자의 보조로 일하게 되어 적성에 맞는지 잘하였고, 이태리 기술자의 기술을 전수받아 이후 pvc 공사는 형의 전문이 되어 사업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동생들도 pvc기술을 익혀 각산업체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공사가 끝날 무렵 이태리 기술자가 형을 신용하여 해외공사가 많으므로 같이 가자고 제안하였고 이를 형은 거절하였다,
-사실은 형이 제대를 한 것이 아니고 보안대 근무 중 실탄오발사고로 탈영을 하였던 것임.-
※처분결과 단순오발이었고 근무를 착실하게 하였으므로 제대 대기 중이었음을 감안 제대시킨 것으로 안다,※
1968. 2. 20. 삼안산업(주) .재일은행 영등포지점신축현장. ※목공사(거푸집 및 내장)시공(개인사업)
1968.10.15. 육군입대 국방부육군00지역시설공사. 2층 막사, 단층막사, 탄약고시공. 공병부대 공사계 및 505육직(삼각공사) 부대근무
1971. 9.25. 만기제대
※나‘ 군 입대를 호적이 늦은 것도 있지만 친구들은 모두 제대하였고, 고향 후배들과 같이 훈련받고 부대 근무하였다, 이는 남파한 김신조 무리가 청와대 진격을 목적하고 왔으므로 병력자원 일제 징집으로 인한 입대였다,
1971.10. 1. 신성건설(주).천우전자 화곡동공장증축현장. 부록(block) 및 철강재공사 파이프트러스지붕시공.
(개인사업)
1972.3.2..천우전자 구로공장신축현장. ※현장기사 (기사)
〃 광진전자 〃 . ※현장기사 (기사)
〃 용인자연농원 돈사신축현장. ※현장기사, 물량산출 및 견적 참여 (기사)
〃 한일재면 구로공장신축현장. ※ 〃 〃 (기사)
〃 천우전자 구로기숙사신축현장. ※ 〃 〃 (기사)
〃 대방빌딩 신축현장. ※ 〃 〃 (기사)
6) 1974.4.5. 충남 서천의 아가씨와 혼인하였다,
혼인하게 된
이야기(story) 2
-1974년 설 명절 전후에 ‘나,’ 구로3단지 천우전자신축 공사 일하기 바빴고 이성을 사귈 생각도 없었다, 그르던 중 구로동 사는 앳된 아가씨와 만남이 있었고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
이때 아버지께서 누이 복순이(시집이 서천) 천거한 아가씨가 있다고 하시면서 충남 서천에 가시어 올라오시지 않으시고 열을 을 넘게 기다리셨다, 하여 ‘현장을 비울수가 없다,’ 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처자가 올라가면 만나보긴 하겠느냐 라며 독촉하시어 그러겠다고 말씀드렸고, 10여년을 홀로 계신 아버지에게 마지막 효도하겠노라는 마음으로 만나기를 약속하였다,
때가 1973년 12월경이었고 이때 연휴로 쉬는 날 현장총무 집으로 현장식구들 모두 가게 되어 동행하였고, 총무집들이 마치고 통금시간이 되어 금호동 초원 여관에 모두 잠자리하게 되었고, 여기서 직원한사람이 화장실 다녀오다 외부인과 시비가 있어 말리러 갔다가 대접만한 유리 재 털이에 머리를 맞아 상처가 생겨 경찰병원서 치료받고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다음날 상견례 자리에 붕대 감은 모습대로 만남이 이루어졌고,
이 자리에서 처녀 모친과 처녀 외조부가 동석하여 담화를 하던 중 처녀 외조부가 그 자리에서 혼약 하자고 강력히 주장하시 엇고 여기에 아버지께서도 당장 약혼 일자를 잡자하시면서 밀어붙이시었으므로 가만 생각하였던바 구로아가씨와의 관계가 아직 깊이사귄 것이 아님으로 아버지 말씀을 따름이 옳겠다, 생각되어 승낙하였다,
물론 구로아가씨에게 통보하였고, 6개월 후 현장에 찾아왔고 모습이 아니었다, 통보받고 6개월을 알이 하였다고 하였다, 구로아가씨에게 미안함은 잊고 있던 사실에 지금 이글을 씀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지금 미안함 있다, 정말로 미안 합니다.
왜, 아마도 아가씨는 나를 깊이 마음에 두었나 보다, “행복하게 잘 살라고 축복을 빌겠노라” 눈물지어보이며 말 하였다, 이는 그때 ‘나,’ 이성에 대한 관계정서가 부족하였나 보다.
1974년2월경 아버지와 누이부부 나 이렇게 참석하여 약혼식은 서천 처가에서 하였고 읍내로 나가 사진 찍는 것으로 하였다, 이때 신체검사(건강검진)제출하였고, 서로 확인하였다.
결혼식은 1945.4.5. 서울 영등포에 있는 신한예식장에서 하였고, 하객이 회사직원, 각공사장 관계인연자, 가족친지 등 상당히 많았다, 이는 또한 고맙습니다,
여행은 생략하였고, 택시타고 남산 북악 등 서울 한 바퀴 돌아보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신혼집을 도림동 남장한 여신사댁에서 시작하였고, 월세로 시작하였다,
이때 나의 재정이 참으로 부족하였고 모두의 혼례경비를 내가 하여야 했으므로,
이야기(story) 3
쇼킹 1, 예식장에 오신 분들의 축하금중 회사(사장님 등)가 준비한(상당한 금액 등) 축의금 다수를 내다바이 당하였고,
쇼킹 2, 신부가 가져온 폐백 등 준비물 가방 등을 택시에 두고 내려서 예식장 과 모 인사가 수배하여 청량리에서 영업하던 택시를 예식장으로 돌려 오개 하여 가방 등 모두 찾게 되었다, 물론 돌아온 택시영업 손실금 맞추어주었다,
1974.7.1.동아건설(주)여의도 K,B,S 방송센타 신축현장※목공사(거푸집시공책임자) (개인사업)
※이때 나를 도와준 목공(거푸집작업 목수)이 하루 500~750명이었다, 새화(작업반장)가 12~3명이 엇고 기초서부터 옥상까지 거푸집 공사완료 하였고, 각 스타(튜)디오, 아나부스 등 내장공사를 하였다.
1974.10.01. 영등포동 철도청 관사인 진00 감사님 댁에 전세로 옮겨 살게 되었다. (전세금20만원)
이야기(story) 3
1975.02.19.(음01.09) 이들 이재숭 태어났다, ※여러 난관이 많았다.
이재숭 태몽은 : 심해에 갇힌 용을 잠금 쇄를 풀어주었고 곧 날개 짓 하며 솟아올라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임신기간3개월여 임부가 곤욕이 많았다,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였고 병원에서 처방하는 영양재로 지났었다,
또한 태아가 발육이 상당하였고 조산원에서 분만을 할 수 없었고 영등포 병원(이름이 기억나지 않음)에서도 아기를 받을 수 없다하였고, 이에 적십자병원에 간호사로 있는(처음부터 조언 듣고 안내받았음) 사촌 처재의 알선으로 영등포역 앞에 있는 곽 산부인과에서 사고책임 에 대한 각서를 쓰고 분만실에 들게 되었고 이때 오후 4~5시경이었고, 분만실에서 수술 없이 순산하였다,
이때 애기 나온다는 안부 차 나온 간호사 왈 쌍둥이 라고 말하였고, 태어난 아기의 체중이 4.2kg이었고 쌍둥이는 아니었다, ?, 이때 신랑인 아기 아버지인 ‘나’ 분만실에 가보지 못하게 하여 산모도 보지 못하였고 애기를 안고와 보여주었고 쪼글쪼글 건강함이 아니 모두가 참으로 좋았다, 애기보고 바로 귀가하려 박으로 나온 나에게 하늘에서 하얀 솜뭉치가 둥실둥실 하늘을 가리고 내려왔다, 거짓 없이 눈송이가 흰 진달래 꽃송이처럼 크고 가득 너울 그렀다,
이야기(story) 4
1976.06.05.(음05.08) 딸 이선민 태어남.
영등포구 신정동 산부인과에서 태어났고, 체중은 3.6kg이었다, 참으로 예쁘고 아름다웠다,
신의 질투가 있음인지 퇴원하고 집으로 와서 친척(처가)이 축하인사차 왔고 단간 방이어서 복잡하기도 하였으나 둘째 처제의 핸드백이 떨어져 애기의 눈가 위가 찢어지는 불상사가 있었다, 그래도 잘 커 주어 고맙다,
1977 . 5. 10. (주)삼환기업 .경주보문단지 관광센타 신축현장. 고 건축공사( 〃 ) (개인사업)
※ 고건축으로 처마 물미(끝 날개올림)잡기 기술 작업하였음, 이후 여러 곳 사찰공사 참여하였음
이야기(story) A
1978.5.1.신성건설(주).부천대흥기계공장증축현장.※견적물량산출현장시공실행책임자 (현장소장)
※1979.10.26.박정히 대통령서거로 방위산업체 공사대금수불정지 됨, 준공직전 이었으므로 ‘나,’ 파산하였다, 이때 상당의 건설사들이 고초를 겪었다,
(6~8개월의 출납이 정지됨으로 회사 존립이 아니 되었다.)
이야기(story) B
1980.12.12. (주)한양주택 .사우디리야드 러쉬현장. +철,콘 내력벽고층아파트공사
※턴널 폼 시공 목공시공책임자(개인사업자이므로 - 회사반장직함)
※사우디 현장 가게 된 사유- 한양주택에서 러쉬현장 운영하면서 사우디 종합대학 건설공사를 수주하였고 현장 목공사 등(거푸집조립해체, 철근가공조립, 콘크리트 타설)을 서울 전경련 19층 본사에서 배종렬 회장님(만나지 못하였음)과 가계약 하고 현장소장의 결정 확인이 있어야 한다 하였으므로 목공기술자와 철근 콘크리트 기술자를 선별하여 출국시킴과 동시 1개월 후 현장에 도착하여 소장 이상무와 논의한바 본사에서 계약을 완성하고 왔어야 한다, 라고 함으로 5개월 20일 만에 회사의 위반사항을 들어 혼자 철수 하게 되었다,
(참고: 한양주택 공사부장 김수영, 과장 장도상, 등 관여실무자들임)
1982. 1.12. 대림산업(주) .사우디리야드하우징 현장. +P·C생산 공장 시공반장
※유공스라브 및 벽체콘크P·C생산 (반장)
※대림산업 회사에서 1년 연장을 권하였고, 유양수 대사께서 현장방문 연장근무하면 대사관 표창 하겠다 제안하였으나 1년 만기하고 귀국하였다
1984. 2.22. 롯대건설(주) .사우디알카라지 고가수조현장. 원형H80m +H48m구형(호로병형)120m고가수조건설
※롯대건설 협력(하청)업체로 폼, 철근콘크리트타설 시공사 타워건설 책임자근무 (롯대건설반장)
※up down sliding 콘크리트 연속 타설 공법시공
(처음설치 한 틀을 그대로 축소 유지하면서 끌어올리며 쉬지 않고 H80m까지 연속하여 타설하는 공법)
이야기(story) C
1983. 00.00. 뉴 월드기술(주) 말레이시아 쿠아라룸푸르 호텔시공(1억8천만불 상당)사 현장책임자 (소장)
현지선발대 59명 출국 클랑시티에 임시 본부를 두고 제반 준비작업 중 서울에서건설 면허를 받지 못하여 3개월을 허비하고 선발대 59명중 32명은 자기부담으로 티켓하여 귀국하였고 잔여27명은 대한항공 외상 티켓으로 귀국하였다, 이는 본사의 철수계획에 의한 것으로 잔류27명에 대하여 법률고문 죠이 씨 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말레이 법률고문이 대납한다는 형식으로 하였고 뉴 월드 서울본사와 협의된 것으로 안다.
※웃기는 대한민국???!!! = 해외 공사를 수주하기도 어려운대 허위공사도 아니고 말레이시아 정부가 인정하고 주택성 장관과, 차기국왕, 법률고문(대법원장) 등이 지원하고, 있는 수주가 한국의 뉴 월드기술에 대한 면허발급을 차일피일 하고 있는 대한의 정부와 청치가 들이 웃겼다,
당시 전두한대통령 정부시절 진의종씨가 총리였고 뉴 월드기술에 편의상 진학종(진총리 아우)을 고문으로 하였고
대한생명 여의도 63빌딩(53층 시공 중)현장소장 조00을 이사 등재하였으며 회사로서의 구비는 결격사유가 아니었음에도 면허를 미루었고,
당시 말레이 주택성 장관과 법률고문이 한국을 답사 확인하고 갔으므로 뉴 월드 현장준비 팀 선발대까지 출국 하였다,
이는 당시 정부에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뉴 월드 주00사장과 나, 허가서가 나온다는 확인된 전재에 말레이로 갔고, 출국 시에 지참한 보유 금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므로 고난이었다,
라이센스(license)없어 국외로의 송금 출납이 아니 되었음,
물론 당시에 외환을 엄격히 통재하였으므로 국부유출을 막는다는 미명으로 통재하여 어렵게 수주된 국외 공사를 놓치고 말았다,
당시 대한민국 말레이시아 주재 대사관에서는 뉴 월드의 어려움(면허의 신속발급 또는 특별 송금해택)을 외면하였고 대사관은 자국민 60여명이 타국에서 어려움을 격고 호소하고 있음도 외면하였다,
이는 기업인이 어려움을 뚫고 이루어놓은 해외건설 수주한 사업을 뭉개버렸고 자국민의 생존을 몰라라 하였다. 어떻게? = 대사관은 그런 것 하는 대 아닙니다, 라고????(주무담당 여사가)
결국은 일본기업에 호텔건설시공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때의 신용은 나 이득인을 죠이씨 와 주택성장관 등이 영주권 주겠노라고 영주를 권하였다,
이러함에도 내가 출국시킨 선발대 기술자들의 무사 귀국을 직접 같이 하기로 하고 귀국하였다,
1984 . 2. 22. 롯대건설(주) .사우디알카라지 고가수조현장. +H80-120m구형(호로병 형)고가수조
롯대건설 협력업체로, ※폼시공사(타워건설)책임자 (반장)
1986 . 3. 1. 경진건설(주) .명일동 한광교회신축현장. ※현장시공책임자 (소장)
1989. 2.20.초록기업(주).수원 삼성전기공장증축현장. ※현장시공책임자 (소장)
91. 2. 25. 〃 .수원 삼성전관 〃 . ※현장시공책임자 (소장)
1991 . 2. 26. 서광산업(주) .하안동 골든 힐 빌딩신축현장. ※현장시공책임자 (소장)
92. 3. 20. 〃 .양재동 인성빌딩신축현장. +무보, 유공 슬라브 시공
위 2개 현장을 동시 관장하였음 ※현장시공책임자 (소장)
이야기(story) 5
1993년 봄, 주공아파트 입주(88년)할 때에 선물 받아 키워온 행운 목에서 꽃이 피었다. ‘약속을 실행하다’라는 꽃말을 가진 행운 목은 나의 아들 이재숭이 카이스트 대학에 입학함을 축하함 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행운 목에서는 꽃대에서 20여개의 밤송이만한 꽃송이에 각 송이마다 수백송이의 꽃이 뭉쳐져 피었다. 그 많은 꽃들이 20여 일 동안 새벽에 피어서 저녁에 또 다시 지기를 계속하였다. 그 향기는 13층 우리 집 아파트에 진동하였다. 이웃들과 타동에서도 꽃구경을 왔다. 사람들은 ‘난 향, 난 향’ 하지만, 행운 목 꽃의 향 또한 ‘많은 사람이 알아주었으면’하는 생각이 들게 좋았다. 나에게 행운 목은 희망이었다.
이재숭 대학입학선물로 철산동아파트 한세대 사주었고,
이재숭 서울대 물리학 박사과정 등록으로 학교근처 낙성대에 원룸 1세대 얻어 주었다.
이선민 수원동우고등학교 교직(국어과목)으로 수원에 원룸 1세대 얻어 주었다,
1993 . 4. 1. 평천종건(주) .수원 남문백화점 개축현장. ※현장시공책임자(이득인실행예산으로 집행) (소장)
1994 . 5. 1. 대건종건(주) 경기광주 신성전기 공장 신축현장. ※현장시공책임자(이득인실행예산으로집행) (소장)
1994년 아들에게 공사장의 일을 경험하게 하였다. 내가 맡아 집행하는 현장이었기 때문에 아들을 삽질, 짐 통지기, 자재운반, 콘크리트 타설 작업 등 시킬 수 있었다. 키가 184인 건장한 아들은 3일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해 버렸다. 이런 경험을 해 보았음에도 아버지(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아들은 내가 어느 정도의 직급에 올랐을 때를 본 것이므로 배움이 부족한 내가 얼마나 힘들게 일을 하고 얼마나 많은 노력하여 가정과 가족을 지켜 나아감을 아들은 이해하지 못 한 것 같다. 한 공사 마치고 다음공사를 준바하는 잠시 쉬었던(쉬는것이 아니엇고 다음공사 견적과 실행예산을 정리 검토하는 시간이었음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시간을 내가 놀았다고 보는 것에 난 기가 막혔다. 심지어는 재판 중 아버지는 일을 하다가 중간 중간 일을 나가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1995 . 5. 1. (주)경보건설 .오산 경기도소방학교신축현장. ※현장시공책임자(실행) (소장)
현장을 총괄하고 있던 나. 전체공사를 맡은 우리 회사(A파트) 말고도 다른 한 건설사(태을)가 들어와 일부분인 (B파트)소방타워 교육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관장하는 학교본관건물과 식당 동 외의 소방타워 하나를 세우고 있었고,
내가 맡은 본관, 부속건물, 식당동 등은 문제가 없었다. 타사의 소방타워의 시공 중 기둥아래쪽에 콘크리트가 충분히 들어가지 않아 공격이 생겼고, 각 공사현장에는 감독관이 존재하며, 정부공사는 감리. 감독을 엄격하게 하므로 감독관이 정부기관의 해당부서에 알렸다. 이에 원시공사 현장책임자와 나 타사의 책임자가 모여 협의 중 나는 이미 다음 위층이 올라간 상태에서 전체를 철거하려면 너무 일이 커지기 때문에 보강공사의 방향을 제시하고는 나왔다.
부실공사에 관해서는 정부감사원의 감사4,5과가 나왔다. 같이 조사를 받았는데, 우리 쪽 건물은 공격없이(곰보)도 없이 깨끗이 시공되었으므로 이상이 없었다. 전 현장을 감마(x-ray)탐지를 하였고, 감사관으로부터 소장부터 책임자들을 조사 하니까. 가방끈 짧고, 면허가 없다고 나를 추궁했다. 나는 거기에“ 대통령은 면허가 있어서 합니까?” 라고 하였다. 현장 경험으로 모두가 인정하였으므로 그 자리를 맡았다, 내가 시공한 건물에 하자가 있는가? 라고 나와 그는 그가 감사를 맡았던 보름동안 계속 시비하였다.
1997 . 5. 〃 속초시 해양경찰서 신축현장 ※부분시공관리참여 (관리)
1999 . 7. 6. ㈜ 제이씨(JC)종합건설 경기광주 헤펠레코리아 현장 ※현장시공관리 (관리이사)
특수공법만 사용했다. 한국청년회
중학교 후배가 일을 도와달라고 해서 내가 관리이사를 맡게 되었다. 티타늄으로 골판을 만들어 2000제곱미터를 외부기25미터 철골 기둥만 세우고 철골트러스 위500평 정도에 징크(티타늄합금)로 지붕을 덮었다. 뚜껑을 덮어 놓고 지게차가 짐을 실어다가 집어넣으며 공사가 진행되었다.
2000년2월경 동절기공사가 잘 진행되던 중 헤펠레 감독관이 야간에 나를 호출했다. 현장소장하고 이야기를 하라고 하였더니, 지금 꼭 직접 와야 한다고 하여 출발했다. 1시간동안 열심히 도착하여 감독관과 함께 현장체크를 하는데, 건물사이에 싸인 눈을 A형으로 쌓아놓은 눈길을 가다가 내가 미끄러져서 다리와 허리를 다쳤다. 무릎의 인대가 파열되었다고 했다. 다친 다음 날에도 책임감 때문에 다음날 깁스를 하고 나갔다. 집에 돌아와서 긴장이 풀리니까, 욱신욱신 쑤시기 시작했다. 이후 작업을 쉬게 되었고 무언가 큰 주사 처방을 받고서 3,4개월 정도 누워 있다가, 이제 더는 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일어났다. 6개월째부터 재활치료 목적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아프니까 4족 보행을 하면서도, 전신 스트레칭이 되니까 곧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버텨내어 극복했다. 아직은 후유증으로 다리나 손이 쥐가 나는 마비 증상이 가시지 않아 다소 고통스럽다.
2000. 9. 〃 성남분당 조이하우스 빌라 ※현장시공관리 개인사업(동업)
이후 포천 오봉사 사찰 복원참여,
속초 향운사 사찰 개축참여,
그동안 남의 건설면허 간판 빌려서 실행 작업만 하였지만, 이제는 내 이름 달고서 일하고 싶어서 개인 사업을 시작하였다.
2005. 까지 태안 靈화사 사찰 시공참여 등 개인사업 하였음,
사찰 건축은 일반인은 못하기 때문에, 보수 공사 개념으로 들어간 것이다.
2005년9월에 처가식구들이 이유 없이 침입 공격해와 사건이 시작됐다.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영화사 사찰 시공에 참여한 것이었는데 법원에 들어가서 영화사 시공은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TE AMO JEOVA, solo hay una para mi, 향수, 애정이 꽃피던 시절, 첫사랑 등이다. 노래를 들어보면 내가 어떤 정서의 음악을 선호하는 지에 대한 나 자신의 감성을 느낀다.
<현재>
독거인으로 보증금 100에 월세16만원(단독)으로 생활하고 있다.
월 생활비는 노령연금 20만원, 주거지원 5만원, 노노케어 20만원, 딸이 어려운 중에도 다소 지원하여 생활하고 있다.
노노 케어 활동 자로 지내고 있다. 어려운 일상 중에 즐겁고 기쁘게, 또는 마음 아프게 밑반찬 전해주는 활동 등을 한다.
낯설고, 불편한 곳에서의 가난한 생활 속에 마침 복지관의 노 노 케어사업소식을 접하고 밑반찬 전해주는 활동을 하게 되었다.
낮설고 궁금하고 서먹함으로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약이 되어주어 이제는 함께 일하시는 분들과 형님 누님 하고 자연스레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적지 않은 활동수입금이 있으므로 생활에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다.
활동의 시작은 전복지사 김칠선님의 소개로 백길현씨 에게 가는 것이었고, 활동 하던 중 조용문씨로 활동 자리를 바꾸었다. 나의 활동자리가 “가까워 좋겠다,” 라고 부러운 농담 하신분도 있었다. 활동 중 대부분은 밑반찬 받으시는 분들의 여러 가지 불만과 불쾌한 언사를 감네 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조용문씨 반찬을 책임지던 나의 앞 두 분이 2개월, 1개월 씩 하시고 그만두게 되었고 내가 활동을 받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평하는 것은 사정이 여의치 않고 시각장애가 있으므로 보행의 불편함과 일상생활이 거의 막혀버린 상태로 지금은 노환이 왔을 때의, 대·소의 실수로 인한 비참함에 ‘얼마나,’ ‘오죽하면,’ 우리들에게 하소연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제 나는 3년차가 되었다.
<자서전 쓰기 감상문>
나 이득인의 인생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사실이 또 다른 감상을 같게 합니다,
이를 구술하다보면 지난 생활과 나의 인생을 돌아보게 됩니다. 잘 하였다(잘 살았다)라고 생각되기보다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다소의 미련도 같게 됩니다. 어쩌면 후회됨은 나 아닌 다른 모두의 아픔일 것이라 생각하는 이해와 사랑이 남게 되는군요.
信 念 (신 념)
2005년9월22일에 발생한 가족 간에의 사건의 잘못된 사법권 판단을 바로잡겠다,
이는 미래세대의 평안하고 믿고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의 환경을 물려주기 위한 것이다.
사고(事故) : 2005.09.22.08:30.때에 경기 광명 하안2동 주공아파트 404동1303호 이득인의 주거에 처가 식구들 처남 윤기필, 장모 구성두, 처제 윤기례, 윤명숙, 처남 윤기배 등들이 이유 없이 침입, 나(이득인)를 폭언협박폭행하며 공격, 주거를 수색하여 기물을 가져가고, 아니 가려한 처 윤기정을 데리고 갔으므로 처를 돌려 보네 줄 것을 촉구하였으나 돌려 보네지 아니하므로 1개월 후인 2005.10.24.날에 부천지검에 고소하였다,
제목
검사 판사가 대한민국 최대의 범죄행위인 4대악의 하나인 "가정폭력 수색강절도 강도납치감금 가정파괴" 행위를 두둔 보호하며 피해자 고소인을 허위고소 무고로 8개월 선고 구금시킨 범죄행위를 하였으므로 이는 검사판사가 가정파괴시킨 범죄자와 공동정범 이었다.
내용
대한민국 범죄 집단 랭킹 = 1위 검찰청, 2위 사법부, 3위 경찰청,
특수 조직범죄 집단 = 大法官 者 무리들! 이들과 함께 사는 것이 부끄럽다.
대한민국은 잘 생기고 잘 만들어진 법은 있으나 유명무실하고,
법은 사법권에 의하여 밟히고 뭉개지고 박살났다.
법에 의거하지 아니하여, 가정폭력과 가정파괴를 당한 피해자는 징역 살아야 하고,
검찰청은 범죄행위가 있었음을 인지, 인정하면서도,
피해자의 고소를 허위고소 무고라며, 싸우지 아니한 부부를 싸웠다는 내용으로 허위의 사실을 조작하였다. 검찰청은 조작된 사실을 이유로 나(고소인)를 무고로 공소하였다.
판사는 가해자 증인들의 공판법정 증언으로 허위고소가 아니었음을 인지하고서,
부부싸움에 대한 허위의 사실에 대하여 고소인에게 확인심문을 받지 아니하고,
허위의 사실을 이유로 하여 피해자의 정당한 고소를 허위고소라고 모함하여 판결하였다.
이를 행한 가정폭력 가정파괴 범죄자들은 활개치고 생활하고,
피해당한 고소인은 억울한 감옥살이를 2회(두 번) 하였다,
위의 사실로 300여회 ‘가해자, 검사, 판사’들의 범죄행위를 연속 고소 항고 재정 재항고 재심 재재심 등 계속 소송하였고,
이를 계속 각하, 기각, 기각 등으로 살인행위 다음가는 가정폭력 강도납치감금 범죄행위를 자신들의 공동정범의 죄와 같이 묵살한 사법부.
다시는 태어나고 싶지 않고, 오고 싶지 않고, 살고 싶지 않은, 대한민국이다.
이 첨부 사실에 대해 대법행정처에서는 “판사는 헌법과 법률에 의한 양심에 따라서 재판하므로 불복은 절차에 따라서 하여야 한다.” 라고 대통령님께 보내는 고소고발사항을 묵살하였다.
판사가 고소인에게 사실 확인 심문도 하지 않고, 허위사실을 조작하여 피해자를 도리어 징역살이 시켰다. 이에 대한 항고 재정 재항고 재심 재재심 등 모두를 300여회 묵살한 것에 대하여 대통령님께 고소고발장 올렸음이 부당한가? 대법관 䎛 들!
사법권이 웃기고 또 웃기고 허위사실을 조작하여 모함공소 모함판결하면서 미처 발광을 하였다.
헌법 103조에 따르면, 판사는 헌법과 법률에 의거하여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 라면
아래 ㉠㉡의 사실로 판사가 인정한 사실이므로 허위고소 무고가아님에도 양심에 따라 무고라 하는가?
㉠고소 = 폭언협박폭행 – 2006노1430판결문에서 축소하면서도 아래 밑줄같이 인정한 사실은
어느 정도 고성이 오가게 되었고 윤기필은 이득인에게 삿대질하였고, 구성두는 이득인의 어깨 등을 두드리며 따지기도 하는 등 폭언이 있었고 흥분한 상태였던 사실, 결국 구성두 등은 윤기정을 데리고 나온 사실 등을 인정할 수 있는 바, 라고 축소 은폐하면서 인정하였고,
또한 판결문상단 첫 머리에 판사가 인정한사실인, 증인 이재숭은 객관적이어 신빙성이 높다, 라고 한 이재숭증인은 윤기필은 가장 격렬 하였고, 구성두가 이득인의따귀를 때렸고 “죽일 놈”이라고 협박하였음을 증언하였다. 위이는 폭언협박폭행이 아니었나?
㉡고소 = 집단침입 폭언협박폭행 수색 기물반출 납치감금(특수수색 특수강도 특수체포감금) - 등을 2006고단257과 2006노1430판결문에서 인정한 사실은
두고 갈 경우에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데리고 오면서 옷가지를 챙겨서 왔을 뿐이다, 라고 판결하였으므로 이는 부부가 싸우지 않았고 싸움을 본 사람이 없으므로 무슨 일이 생길 수 없고, 데리고 갔고 돌려 보네지 아니하였음은 윤기정이 아니 가려 하였으므로 강제로 데리고 간 체포감금이었다.
㉢위와 같이 판결문에서 인정하였으므로 이득인의 고소내용이 허위가 아니었음을 증거하고 침입가해한 자들을 즉시 처벌하여야 함에도 처벌치 아니하고 피해자 고소인을 무고하였다.
고로 고소인은 무죄이며 피해자로 보호받아야 함이다.
헌법 103조의 판사는 헌법과 법률에 의거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 라면
위 같이 사법권이 인정한 사실을 묵살하고 검사 판사가 아래같이 모함하였다.
※고소인 부부가 싸우지 아니한 사실을
㉠부부가 싸웠고,싸운다고 전화로 연락하였고,
㉡와서 데리고 가라 하였고,
㉢도착하여 윤기정 만을 두둔하며 싸움을 말렸다.
㉣라고 허위의 사실을 조작하여 무고이유로 하였다.
앞 조작행위에 대한 반박
※이득인 으로 부터 위증으로 고소당한 윤기정은 07고단1032법정 공판에서 ‘부부가 싸우지 않았음을’ 증언하였다.
㉠증인 침입 가해자 구성두(당일 유일하게 통화한 사람)는
싸운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른 말없이 왔다가라 하였다, 하였고,
또한 2007고단1032법정 공판에서 싸운다고는 말하지 않았고 왔다가라 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이와 같으므로 이득인은 싸운다고 말하지 않았고, 데리고 가라는 말 하지 않았음이 증거되었고,
㉢검사 판사가 허위사실조작 모함하였음이 증명되었다,
㉣고소인 남편과 처 윤기정이 법정에서 싸움이 없엇다 고 증언 하였으므로, 와서 싸움이 없었는데 윤기정 만을 무엇으로 두둔하였나?, 어떻게 말렸나?
이는 이유 없이 공동하여 집단으로 침입 공격하였음이다,
위 같음이 판사는 양심에 따라서 허위사실을 조작하고 피해자를 뒤집어 처벌함이 온당하고 양심이 있는 것인가?
※위같이 허위조작 犯罪行爲 者와 斗頓 保護한 者 집단 명부는
검찰청 검사 –175명, 사법부 판사 –159명, 대법원 대법관 –224명,
2018.02.06까지 명단 기 소송마다 제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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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함을 표하여 드리고 싶은 분,
부모님 : 고난과 고통 역경의 세월 속에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고마움, 잘되고 못됨은 나의 몫이었을 뿐,
세상구경 잘하라고 바라고 바람 하셨을 터, 어떻게, 어떻게, 또 어떻게 표할까? 부디 평안히 영면하시길!
형수 : ○ 먼저 ‘감사 합니다’ 말씀드리고, 형과 혼인하시어 가난한 우리 집으로 오셔서 격어보지 못하셨을 가난에 고통을 격어시며 아래로 시동생 넷 시누이하나 그리고 혼자이신 시아버지에 모두가 어려웠을 테지요, 이를 모두 참아내신 형수님의 고통을 이해하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형제 모두는 잘 알고 있지요, 부디 건강하시고 여생이 평안 하셨으면 합니다,
근데 그거 아세요? 형수님이 말씀하신 형에 대한 말씀이, 형은 자라며 맛있는 것만 먹고 귀하게 컸다고 하신 말씀.... 물론 형이 한 말이겠지요, 이 말씀은 아우들에게 상처임을 모르실테고요,
동생들은 허기진 생활에 지치고 있었음을 이해하셔야 해요, 한사람이 호의호식할 때 다른 사람들이 어떠하였겠는가를! 그래도 형수님을 형제들이 좋게 생각하고 있지요. 그러한 형에, 치이고 밀리고 마당 한편에 버려진 들꽃 같은 형제들이니까요. 다 잊으시고 평안한 노후가 되시기 바랍니다.
친구 : ○ 먼저 현제까지 하고 있는 송사에 애타고 속 타고 미치고 환장할 것 같은 ‘나, 을 수년간 도와주고 위로하며 지켜준 H S K, 임께는 여기 글로서 다하지 못하나 진정 감사하고 고맙고 미안함을 표하고 인사드립니다,
또한 향우 학우 사회 등 모든 친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진정 고마웠다, 고 말합니다.
○ 다음 ‘같이 자란 벗들,’ 모두 지금까지 함께 살아주어서 고맙고 그대들이 있어 아직 살맛난다 할까? 언제까지나 건강하게 옆에 있어주기를 갈망합니다. 그대들 있음에 내가있고 내가 존재함으로 그대들 있지 아니한가! 고맙고 고마움을 그대들이 있어야 외롭지 않음에 고맙다할 것이므로... 고마울 뿐이다.
○ 다음 나의 사회 활동을 이끌어주시고 인도하여 주신 많은 분들, 배움이 부족한 나를 가르쳐 주시고 세워주신 많은 선배님들의 믿음을 다 하지 못한 것 같아 송구할 뿐입니다, 부디 평안히 영면하시고 생존해 계신 모든 분들의 건강과 평안함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현재 이웃: 수년간 거주하며 살고 있는 금천구 가산동 우리 동네 이웃들 독거인인 ‘나, 주거를 제공해 주신 분, 또 주민 센터가족 과 복지관 복지 사 여러분께 감사하며 노 노 케어 활동참여를 시켜주어 감사하다 인사드립니다, 또 같이 봉사하고 계신 모든 분들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이제 위 모든 분들이 건강하시고 가내 평안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유언장
성 명 : 이 득 인 생년월일 : 1945.11.14.(음10.10.) 주민등록 : 1947.01.15.
주 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로 118-4(가산동) 작 성 일 : 0000. 00. 00.
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1) 배우자에게 – 관계없음,
2) 자녀들에게 – 잊고 잘 살기,
3) 친구, 친지들에게 – 모두 오늘 같은 마음으로 평안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램(바람) 한다,
Ⅱ. 내가 떠난 후에
1) 나의 장례식 - 화장을 가족에게 선포하였다,
장례식 장소, 집례 – 화장 지구 밖으로, 예다함 상조가입 되었으므로 부탁하고,
조문객 – 보고 싶지 않은 자식과 가족은 거 누구도 와서는 아니 된다, 그 왜 관계치 않는다,
※,나 죽음에 의미 없다, 지구상에 연기나 그림자로도 남고 싶지 않다.
2) 사후 유산 처리 문제
물질은 가진 것 없으므로 사회에 반환 못함은 미안하고,
마음을 말하면 다 잘하고 있으므로 더 할 것이 없다,
바람은 모두, 만사는 건강으로부터 이므로 무조건 건강하길 바랄 뿐임,
※,자식은 아비가 준만큼은 사회에 반납하라!
Ⅲ. 그 밖에 남기고 싶은 말
가족 - 논할 가치 없음 - 思考가 다른 서로가 고통일 것이므로 그냥 간다,
※국가와 사회 - 지식인이 먼저 깨우치고 스스로 반성하는 사회가 되길 바램(람)한다. 법관이 법을 지키는 나라가 되기를 갈망한다.
죄지은 자가 반성 할 줄 아는 나라가 되기를 갈망한다.
현재로부터 나머지 생활계획
1, 건강하자,
- 운동의 필요성,+ 생각과 사고의 폭을 넓히자,+ 특히 안구운동을 하자,
2, 스스로 개발 노력하자,
3, 남에게 피해되지 않게 하자,
4, 마음으로부터 봉사 하자,
5, 여행을 하자,+ 산행
6, 멋지고 힘차고 은근히 신나게 살자, (가난하여도)
7, 이웃과 친구들, 지금보다 더 잘 지내자, 그들이 나를 ★★★★★평점으로까지,
※지금도 잘 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 信 念 -
8, 현재 하고 있는 소송을 더 열심히 하자, 꼭 승소함으로 법이 지켜지게 하자!
※지금도 잘 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사법권이 스스로의 죄를 인정할 수 있는 진짜의 양심을 찾을 때까지 쉼 없이 끝까지 달린다.
혹 위 8,의 내용이 궁금할 수 있으므로 안내드림
인터넷 검색 : 건곤감리3456이득인, 또는 ldi3456이득인,
단문으로 검색 : 범죄 집단 사법부. 또는 범죄 집단 랭킹
위 모두를 다소 미흡하나 발간되어 여러분께 인사할 수 있어 고맙고 감사 합니다.
이제 이를 바탕 하여 유종의 미를 간 수 한 상세한 글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신 모두에게 감사인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8.06.23. 글쓴이 이 득 인 드림